학고재 본관에 걸린 12점의 ‘산수’ 연작은 설악, 홍천, 평창 등 강원도 산야의 설경을 담은 것이며, 신관의 낙산 시리즈(22점)는 강원도 낙산 해변의 눈 내리는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중 ‘낙산’은 작가가 2007년부터 발표해온 대표적 연작이며, ‘산수’는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이다. 그러나 ‘산수’ 연작은 최근작인 동시에 권부문이 지난 30여년간 집중해온 풍경 작업 끝에 도달한 고지이자 결집체란 점에서 관심을 끈다.
권부문이 이번에 자칫 고답적일 수 있는 ‘산수’를 디지털 사진의 명제로 삼은 것은 전통 산수라는 장르를 답습하거나 복고를 차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선조가 산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정화했던 와유(臥遊)의 태도를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자신을 드러내는 거울이자, 수기(修己)의 도구로 삼았던 전통 산수화와, 풍경을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로 여기는 권부문의 사진은 ‘이미지를 대하는 자세’에서 맥을 같이한다. 권부문은 자신의 산수 연작을 접한 관객들이 저마다 자신 앞에 활짝 열린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소요하며, 화면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길 원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의 내면과 만나지 않겠느냐는 것.
이번 출품작들은 유난히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눈도 많이 내린 이 계절과 꼭 어울려 감상의 묘미를 더해준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 마치 백지(白紙)인 듯한 흰 대지와 검은 바다 위로 끝없이 흩날리는 눈, 잔가지마다 흰 눈을 가득가득 품은 채 적막함을 뿜어내는 겨울 산, 거대한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흑백 톤의 사진들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과 미감을 오롯이 전해준다. 풍경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예리하고도 명징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또한 어느새 그 공간에 와 있는 듯하다. 그리곤 세포 하나하나에 청명함이 가득 채워지는 것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권부문은 이미지를 일부러 만들기보다는 ‘내 앞에 드리워진 자연과 그 이미지를 섬긴다’는 자세로 작업한다.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진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것. 순간마다 접하고 느꼈던 공간과 자연을 관객 앞에 성실히, 그러나 엄정하게 옮겨놓는 셈이다.
작가는 “사진은 빛에 의한 대상의 재현이다. 빛의 공정함, 엄정함을 준수하는 게 기본인데 오늘날 사진들은 빛의 낭비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사진가들이 자신의 메시지와 기술에 근거해 화려한 효과들로 바라보는 대상(피사체와 빛)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피사체가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거꾸로 메시지에 종속됐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그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는다. 진실한 해석을 통해 사물을 재현하는 권부문의 사진에서 메시지는 사실 불필요하다. 전시는 2월27일까지. (02)720-1524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이영란 기자/ 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