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파리 기자들이 묻더군요
넌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
박수 받으며 비참했죠”
“길소뜸 들고 처음 베를린에 갔어요.
질문 대부분은 너네 나라에선 검열을 어떻게 하나였죠
한쪽선 세계적 감독 회고전을 하는데
내 영화는 아무도 관심이 없더군요”
“반공교육까지 받고 갔던 모스크바
한국와선 돈주고 상타왔냐는 말도 들었죠
언젠가 감독님께 술주정 한적 있어요,
나를 일찍 이렇게 만들어놨으니 책임지라고”
영화감독 임권택(77)의 삶은 고스란히 ‘현대사의 증언’이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하던 청년 임권택이 먹고살기 위해 영화로 전업한 1955년 이후 그가 걸어온 길은 오롯이 ‘한국 영화사’가 됐다. 그 길에서 임권택은 수많은 인연을 만났다. 스승(정창화 감독)과 평생의 반려자(채령)를 얻었으며, 숱한 영화적 동지와 마주쳤다. 임권택의 길에서 그들이 들고 났던 궤적은 마땅히 한국 영화사의 일부가 됐다.
그 ‘운명적 만남’ 중의 하나가 영화배우 강수연(45)이다. 서구인들에겐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을 때인 1987년, 제44회 베니스 영화제는, 강수연의 말을 빌리자면 “남한인지 북한인지도 헷갈려 하는” 아시아의 작은 반도 반쪽 땅에서 온 갓 스무 살의 여배우를 연기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세계무대에서 한국 영화의 웅비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9년엔 임권택과 강수연의 두 번째 만남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당시 세계 4대 영화제로 꼽히던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월드 스타’라는 호칭을 선사 받았고, 임권택은 해외무대에서 한국 영화를 상징하는 얼굴이 됐다.
봄을 시샘한 겨울의 마지막 눈이 전주의 한옥 지붕을 살포시 덮은 지난 17일,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이 서울을 떠나 한지의 고장으로 가는 3시간여의 길을 동행했다. 박현구 기자/ phko@heraldcorp.com |
그리고 22년이 지났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101번째 영화 ‘달빛길어올리기’에서 여 주인공으로 강수연을 캐스팅했다. 세 번째 만남이다. 임 감독이나 강수연이나 모두 낯설고 새삼스러운 숫자다. 두 사람 모두 “딱 두 편뿐이었다는 걸 우리만 몰랐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100번째 작품’이라는 세계영화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고갯길을 넘어오는 동안 ‘언젠가 함께해야지, 해야지’라고 숙제처럼 강수연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강수연은 “감독님 영화 하시는 것은 항상 봐왔다”고 했다. 한국 영화사라는 큰길에서 두 감독과 배우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움을 반복하며 때론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서로의 걸음을 지켜주고 있었다.
봄을 시샘한 겨울의 마지막 눈이 전주의 한옥 지붕을 살포시 덮은 지난 17일,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이 서울을 떠나 한지의 고장으로 가는 3시간여의 길을 동행했다. ‘달빛길어올리기’는 우리 전통의 종이인 한지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이고, 주 촬영지가 전주의 한옥마을이었다. 강수연이 특유의 장난기를 보이면 눈을 살짝 흘기는 임권택 감독은 응석받이 막내딸을 보는 아버지였고, “둘이 마신 술을 치자면 양조장을 하나 차릴 것”이라고 할 때 70대의 감독과 40대 배우는 오랜 길을 함께해온 동지였다.
◆참담했던 1980년대, ‘반공교육 받고 80불짜리 호텔에서 잔 국제영화제’
-두 분이 처음 만난 건 1986년 ‘씨받이’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당시에 강수연 양이 고교청춘물에 출연하고 있었어요. 연기력 좋은 아역 배우 출신이었죠. 씨받이라는 영화의 여 주인공이 필요한데, 무슨 씨받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임신할 여자 데려올 리는 없어요. 종가의 대를 이어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가임기인 열여섯에서 열여덟, 이런 나이를 골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그런데 애를 낳고 떠났다가 애가 보고 싶어서 그 집 가까이 와서 자살을 했단 말이요. 이것은 열여덟 살이 감당해야 될 세계가 아닌 거요. 엄청난 세월을 산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열여덟 살. 그런 배우가 누구냐고 했을 때 강수연 양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거요.
▶강수연=그때나 지금이나 감독님은 똑같으세요. 그때는 제가 어려서 더 무섭긴 했지만. 지금이야 떼도 쓰고 농담도 하지요.
▶임=(혼잣말처럼) 지금은 내가 더 어렵고 힘들어.
- ‘씨받이’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는데, 한국 영화에선 전례가 없던 큰 경사였지요. 그런데 시상식 현장에 두 분 다 안 계셨죠?
▶임=일본에서 들었어요. 한국 영화를 소개하는 행사가 있어서 베니스에서 바로 일본에 갔는데 마침 그때 수상을 하게 된 거죠. 일본 사람들까지 “이렇게 큰 상을 받으러 가지, 뭐 하러 여기 왔느냐” 하는 거요. 또 한국 신문들을 보면서 그렇게 큰일을 다루는 게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했어요. 당시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베니스 영화제에 갔는데, 예산이 없다고 연락선 타고 들어가면 골목길에 있는 80불짜리 호텔 방을 잡았어요. 철침대가 있는 방을 둘이 같이 썼지요.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는. 그만큼 경험도 없고 융통성도 없던 거죠. 독일 방송국에서 만나자기에 갔는데, 어떤 여자가 나보다 먼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심사위원장이라고 하는 거요. 그 여자가 “금년에 본 영화 중에서 ‘씨받이’가 가장 재미있고 좋았다”고 하기에 그 큰 상을 받을 줄은 모르고 면피용으로 작은 거 하나 받을 수도 있겠지 생각하고 일본으로 바로 갔어요. 저는 강수연 양이 보나 마나 상을 탈 리도 없고 하니까 가기 싫어서 안 간 줄 알았더니 영진공에서 연락도 안 했다고 하더군요.
▶강=저는 영진공 직원한테 전화받고 알았어요. 수상 결정이 나자마자 전화를 했던 모양인데, “강수연 씨가 여우주연상 받는다”고 하기에, 내가 너무 기가 막혀서 “왜? 왜? 왜 나한테 상을 줘?” 이럴 정도였다니까요.
“씨받이 베니스 수상 소식 일본서 들어
상 받으러 가야지 여기서 뭐하냐는 거요
강수연도 싫어서 안 간줄 알았는데…
영진공서 연락도 안했다더군요”
◆한국 영화의 거장과 ‘월드스타’의 탄생, 그리고 영광의 뒤안길
-다행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때는 두 분 다 시상식에 참석했죠?
▶강=당시에 모스크바 영화제가 소련 개방 이후 국가적인 홍보전으로 대단한 행사였어요. 베니스에서 상을 탔으니까 한국 언론이나 관객들 기대도 굉장했지요. 감독상을 받냐, 여우주연상을 받냐 이랬으니까요. 그런데 시상식 전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예요. 감독님하고 저하고 호텔방에 모여 보드카 마시면서 못 받으면 실망할 텐데 일본에서 배 타고 어떻게 조용히 들어갈까 이러고 있었다니까요. 드레스 잔뜩 넣어온 트렁크를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주연한 영화가 연거푸 세계 굴지의 영화제에서 여우상을 받은 것은 그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있기 어려운 기록인데.
▶강=감독님 덕분에 큰 상을 타서 정말 영광이죠.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받았기 때문에 부담감이 엄청났죠. 관객들은 절대적인 기대치가 있으니 저로서는 버거웠어요. 남들은 큰 상 받아서 좋겠다 했는데 정말 그 무게감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지금도 힘들고. 요즘 생각해보면 다행인 것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잡아준 거죠. 언젠가 술 마시고 “나를 일찍 이렇게 만들어놨으니까 책임지라”고 감독님께 주정한 적도 있었어요.
▶임=당시에 강수연 양이 상을 받고 나서 집사람(채령)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뭐인가 하면 (강수연이) 이제 학교라도 가고 확실한 관리자가 붙어서 조심스럽게 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알면 나라도 나설 텐데 나도 몰랐던 거요. 세계적으로 큰 배우가 됐는데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 아무도 몰랐던 거요.
-당시엔 한국 영화가 세계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영화제에 가면 어떤 반응이었나요?
▶임=‘만다라’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1981년ㆍ경쟁 부문)받으면서 사실상 임 아무개라는 감독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다음에 바로 ‘길소뜸’(1986년ㆍ경쟁)을 가지고 처음 베를린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느낌이 참담한 거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없고 말이요. 질문이 대부분 “너네 나라에선 검열을 어떻게 하나”였어요. 그런 질문받을 땐 나라 안 사정을 솔직히 대답할 수도 없던 거요. 정부 사람 따라붙고 하기 때문에…. 하늘에 대고 침 뱉기이기도 하고. 한쪽에선 세계적으로 알려진 감독이 회고전을 하고 있는데 내 영화는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구나 이런 생각에 참담하기 짝이 없었어요.
▶강=모스크바 영화제 때는 소련과 국교가 맺어지지 않았던 때라 비자를 만들려고 일본을 갔다가 다시 파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어요. 출국 전에는 반공교육도 받았어요. 그렇게 하고 모스크바 공항에 내리는데 다들 거지꼴이었죠. 당시엔 “북한에서 납치해간다” 이런 루머도 있었고, 상을 받고 나서는 “돈 주고 상 타왔다” 이런 말도 들었어요. ‘씨받이’로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식 인터뷰를 하는데 유명한 프랑스 영화지 기자가 “ (영화에서처럼) 여자가 그렇게 대우받는 사회에서 결혼해 살고 싶니?”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여기(파리)에 오기 전까지 프랑스 여자들은 다 잔 다르크인 줄 알았다”고 말했죠. 박수를 받았지만 그런 질문 받으면 비참해요. “너네 나라에서 배우 하면 얼마 받니?”,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 이런 질문 많이 받았어요.
“전주 한지 다룬 임감독님 101번째 영화
마치 영화 잘 찍는 신인감독 작품 같아요
이전 것 다 버리고 새로 찍을 수 있구나…
젊은 감독들도 이렇게는 못 할걸요”
◆22년 만의 프러포즈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이후 세 번째 만남인데.
▶임=강수연 양과 영화를 굉장히 많이 한 줄 알았더니 딱 두 편인 거요. 스무 살 무렵 딱 두 편하고 저 배우가 40대가 되도록 내가 한 작품도 안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40대가 지닌 매력을 찍고 싶었어요. 강수연 양이 어렸을 때야 연기 말고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여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 일하면서 여러 면을 보게 됐는데 ‘배우가 아니고 다른 것을 했어도 크게 성공했을 사람이구나,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구나’ 이런 걸 느꼈어요.
▶강=한지 영화 하시는 거 알았고 잘 되셔야 하는데 마음만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만나자고, 할 얘기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뵈었더니 너 한 번 해보지 않겠니 하셨죠. 감독님하고 예전에 작품을 해왔지만 현장에 있으면 배우를 만들고 다듬고 감싸주시는 느낌을 받아요. ‘나를 아끼는구나’ 그런 느낌. 스태프는 아들 같고 딸 같으니 감독님 대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그 아이들한테도 따뜻하게 잘해 주세요. 앞으로 20년 후에도 꼭 같이할 거예요.
-101번째 영화를 한지 소재로 택한 이유는?
▶임=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인 민병록 교수가 한지를 영화로 했으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왔죠.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 사람들이 살아온 것 중에서 영화가 될 법한 것을 해왔으니까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던 터에 한지 이야기가 나오니까 한 번 해볼 만하겠다 생각했어요. 마침 전주시가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영화로 하자 했죠. 그러면서 이게 101번째인데 기왕에 해왔던 100번째까지의 임권택이라고 하는 것을 그만 찍고 새로운 영화로 보이게 찍자 했어요. 그래서 지장(한지의 장인)을 취재하면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보자 했던 거요.
▶강=이제 전 스태프가 한지를 뜰 수 있을 거 같아요. 촬영 마지막 날 모니터를 뒤에서 봤는데 너무 새로운 거예요. 이제까지는 드라마가 강하고 깊이 있는 작품을 주로 찍으셨는데, 이번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전 감독님하고 달라요. 마치 영화 잘 찍는 신인 감독 작품 같아요. 이렇게 영화 오래 하신 분이 이전까지의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찍을 수 있구나. 젊은 감독들은 이렇게 못 찍을 걸요. 놀라워요. 그래서 첫 기술시사회가 끝나고 감독님께 ‘오래 사셔야 해요, 영화 잘 만드시잖아요’. 이렇게 말씀드렸죠.
-강수연 씨는 영화 속에서 강인하고 독립적인 이미지의 여성을 연기를 해왔는데, 실제로도 그런가요?
▶강=영화 속 이미지일 뿐이죠.
▶임=강수연 양이 자기를 착각하고 있는데, 실제 일상생활에서도 기가 펄펄 살아가지고 남자가 겁을 먹어요.
-강수연 씨가 결혼을 하게 되면 임권택 감독께서 주례를 맡으실 건가요?
▶임=제가 매번 그럽니다. 뭣이 부족해서, 뭐가 잘 못 돼서 결혼을 못하고 있니. 그러니까 제가 주례를 꼭 해줘야 하는 두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조감독 남지영이고, 또 하나가 강수연 양이죠.
-두 분이 술자리도 자주 가지시나요?
▶강=소주, 맥주, 와인, 코냑, 보드카…. 감독님하고 마신 술로 양조장도 차릴 걸요? 감독님이 워낙 노래를 안 하시는데, 몇 년 만에 한 번씩 부르시거든요. 무조건 ‘방랑시인 김삿갓’인데, 저는 몇 번을 들었어요.
▶임=제가 박치에 음치라서. 얼른 끝낼 수 있는 노래가 ‘방랑시인 김삿갓’이에요.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험한 길 지날땐 감독님 팔짱끼던 배우
함께 한 작품 단 3편…새삼 놀라울 뿐
데스크가 본 그들
두 사람을 따라 전주시 풍남동 한옥마을에 도착하니, 하필 진눈깨비가 내려 길이 미끄럽고 질척거려 걷기에 다소 불편했다. 강수연은 노 감독 곁에 바짝 붙어 걷다가도, 험한 듯 보이는 곳을 지나갈 때면 슬쩍 노 감독의 팔짱을 끼곤 했다.
임권택 감독이 스스로 ‘데뷔작’이라고 선언한 101번째 영화 ‘달빛길어올리기’에 강수연을 불러냈다. 86년 ‘씨받이’, 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다. 22년 만이다.
인터뷰 중 강수연은 “너무 어린 나이에 감독님이 나를 높은 곳에 올려놨다”며 베를린 영화제 수상 이후 월드 스타라는 명예가 버거운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말수 적은 노 감독도 부인 채령 씨가 그녀의 앞날을 걱정했던 일을 뒤늦게 알려줬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1986년 ‘씨받이’로 강수연이 받은 여우주연상은 한국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첫 번째 작품이다. ‘씨받이’는 임권택 감독이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다. 반세기를 달려온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강수연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두 사람이 함께한 영화가 단 3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착시’를 느끼게 하는 이유다.
노 감독 앞에 다시 서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에도 강수연은 자칭 신인 감독의 새로운 실험에 동참한 든든한 배우였을 게 틀림없다.
그들의 삶과 관계
▲임권택(77) |
‘만다라’와 ‘길소뜸’으로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임 감독은 드디어 ‘씨받이’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수상으로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90년대 들어선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등의 작품으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2000년대엔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100번째 연출작 ‘천년학’을 내놓은 2007년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을 헌정 받았다.
▲강수연(45) |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