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민낯에 헐렁한 트렁크. 머리를 질끈 묶은 그의 얼굴에 예쁘게 보이려는 ‘여배우’는 없었다. 승리에 굶주린 파이터의 눈빛이 작고 뽀얀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큰 키와 긴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펀치는 복싱 가문에서 태어난 성소미(16ㆍ순천 청암고)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지난 17일 안동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7회 전국 여자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 48㎏급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시영. 이제 여배우보다 복서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법한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안티팬을 보유한 대표적인 ‘비호감’ 배우였다.
출세작인 ‘꽃보다 남자’에서 그는 날카롭고 질투 많은 성형미인 ‘오민지’를 연기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자 이시영의 성형 전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았고 그의 나이 조작, 톱스타와의 열애와 이별이 연일 구설수에 올랐다. 안티카페가 하나둘 등장했고, 그의 기사에는 악성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러나 이시영은 신경쓰지 않았다. 악성 댓글을 단 사람과 쪽지도 주고 받았다.
충북 청원에서 자란 그는 예쁜 척 따위는 접어두고 “개구리를 즐겨 먹고 뱀술도 담궈봤다”고 털어놨다.
‘직무유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순신’을 외치던 KBS ‘부자의 탄생’의 부태희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시영은 성형ㆍ열애가 아닌, 연기자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여자 복싱선수를 소재로 한 단막극 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복싱을 배우게 된 그는 단막극 제작이 무산된 뒤에도 연습을 계속했다. 영화 촬영과 홍보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매일 5㎞씩 뛰고 2시간씩 샌드백을 두드렸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이시영은 결국 3회 우승과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시영을 복싱에 입문시킨 이충섭 씨는 “가소롭게 본 이시영이 이럴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여배우가 얼마나 하겠느냐’며 코웃음 치던 이들도 이시영의 매서운 주먹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여배우에 대한 편견, 뽀얗고 새침한 얼굴에 가려진 이시영의 작은 핵폭탄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을는지 모른다.
김윤희 기자/wor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