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생의 사전적 의미는 ‘대학에서 어떤 과목에 대하여 정식으로 수강을 신청하지 않고 강의를 듣기만 하는 학생’이다. 정식 대학생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청강생 제도는 1960년대에 활성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강생들은 입학금과 수업료 등을 내고 정원 외로 대학을 다녔지만, 학사학위는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청강생 제도는 사립학교들 사이에 관행처럼 운영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부정입학생 논란, 대학들의 학위장사 논란으로 비화되며 결국 1981년 교육법 개정으로 폐지됐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씨는 1975년 단국대 영문학과에 청강생 제도를 통해 입학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순실씨가 1979년 6월 10일 서울 한양대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밀착 수행하고 있다. 당시 최씨는 단국대 청강생이었지만, 자신을 단국대 대학원 영문학과 연구과정생이라며 새마음봉사단 대학생총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 |
대학은 다니지만 정식 대학생은 아니었던 최순실씨가 당시 새마음봉사단 대학생총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더욱 충격적인 건 학사 학위가 없는 최씨가 자신의 신분을 단국대 대학원 영문학과 연구과정생이라고 소개하며 활발한 외부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최씨는 지난 1979년 6월 10일 서울 한양대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 참석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새마음봉사단 대학생총연합회장이라는 자격으로 밀착 수행했다. 당시부터 최씨는 청강생 신분을 숨긴 채 단국대 대학원 영문학과 연구과정생 신분을 가장한 셈이다.
최순실씨 아버지인 최태민씨는 1975년 2월경 당시 박근혜 대통령 영부인 대리에게 3번에 걸쳐 편지를 보내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같은해 최태민씨는 자신의 딸인 최순실씨를 단국대 영문과에 청강생으로 다니게 한 셈이다.
당시부터 1956년생인 최순실씨는 최태민씨의 영향 아래 1952년생으로 4살 위인 당시 박근혜 영부인 대리와 친분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4~5년간 청강생이면서도 대학생 단체 회장을 맡을 정도로 영향력을 키워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청강생 제도가 폐지 수순을 밟은 계기는 1965년께 국내 사립대학들이 정원보다 훨씬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려 하면서 그동안 곪아 있던 대학입시 관련 문제들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1965년 교육행정을 주관하던 문교부는 당시 이화여대가 신입생을 정원보다 많은 734명을 추가로 뽑자 이를 취소하라고 하며 정부와 사립학교간 갈등이 시작됐다. 이대 측은 신입생이 3~4학년 무렵이 되면 입학 때의 30%가 줄어든다며 이미 지어놓은 시설과 확보한 교수요원을 놀릴 수 없어 그에 대비한 것이라며 맞섰다.
결국 이 논쟁은 문교부와 사립대간의 갈등으로 비화됐고, 국내 다른 사립대들도 정원보다 30~40% 많은 신입생을 뽑는 등 그해 24개 사립대에서 7600명 가량의 정원 외 학생을 뽑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사태 때문에 그 다음해인 1966년에는 관보대학생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문교부가 '대학의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가 심각해 우려된다'는 취지로 대학정원 한도 내에 입학한 신입생 명단을 관보에 게재하고, 이들만 정식 대학생으로 인정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 정원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대학정원령도 선포됐다.
이렇게 이른바 ‘관보 대학생‘이 등장하면서 정원 외 대학생이나 청강생이 양성화됐다. 정부가 대학정원령 실시와 함께 ‘선의의 피해자는 구제할테니 대학별 재적생 숫자를 보고하라‘고 했더니 정원 12만3150명보다 3만2000여명이 많은 15만5500여명이 보고됐다고 한다.
이런 갈등을 바탕으로 1968년 정부는 정원 외 학생근절대책을 내놨다. 대책은 다음과 같다.
①대학 합격자는 문교부 장관이 확인한 입학허가통지서를 교부받아 보관해야 한다.
②청강생 등 정원 외 입학자에게는 학사학위등록증을 교부하지 않는다.
③학위등록증이 없는 자는 대학을 4년 다녔다 해도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의 채용시험이나 자격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규제한다.
1969년 1월 국회에서 열린 사립대 관련 특별감사에서는 정원 외 학생과 청강생 등의 운영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립대학들은 비용 부족 등의 이유로 학생 정원의 약 20% 가량을 청강생으로 추가 선발하는 게 관례화돼 있었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는 대학이 순수한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이 아니라 부모들의 소 판 돈으로 쌓아 올려진 '우골탑'이 아니냐는 성토가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부 대학들이 학생 성적과 상관 없이 기부금을 받고 보결생으로 뽑아주거나, 문교부 관료들의 부정입학 청탁을 들어준 사례 등이 드러나 교육계를 경악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국회는 앞으로 대학 동창회 명부는 정규 학생과 청강생을 구분해 작성할 것, 청강세 등록금에 과세 조치할 것 등을 건의했고, 점차 청강생이나 정원 외 입학생에 대한 규제가 강화돼 결국 1981년 청강생 제도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soo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