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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신인상주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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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미칠 노릇이군."

1884년 프랑스 파리의 한 작업실. 아이고, 여기는 왜 이렇게 좁아…. 한 꺽다리 남성이 구시렁대며 들어옵니다. "하! 진짜구먼." 그는 이곳에 있는 화가가 하는 '짓'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쉽니다. "이보게, 나야." "아, 자네 왔는가. 무슨 일로?" "요즘 계속 이상한 짓을 한다길래 들러봤어. 그러니까,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점'을 찍고 있다고?"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이건 과학일세." 꺽다리 남성의 도발에 화가가 단호히 답합니다. 붓을 든 화가는 캔버스에 또 점을 찍고 있습니다. 쌀알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자네, 최근 그랑드자트 섬을 그린다고? 그 풍경도 점을 찍어 만들 생각이야?" 끄덕. "인상주의 양반들이 붓질 몇 번으로 쓱쓱 그려내는 물체들을 다? 수백만 개의 점을 찍어야 할 걸세. 그런데도?" 끄덕.

꺽다리 남성은 이쯤 되니 이 화가의 정신 상태가 걱정됩니다. 과학이라고? 이건 과학이 아니라 그냥 아집이고 망집이야. 얼마 전 살롱전에 내놓았던 싱거운 그림이 낙선한 게 아직도 큰 충격인가. 빛나는 재능이 아깝군…. "왜 스스로 힘든 길을 가나. 누가 시키지도 않은 쓸모없는 실험에 나서는지 이해할 수 없군." 꺽다리 남성이 목소리를 다소 높입니다. 화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응수합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이 고집스러운 화가의 이름은 조르주 쇠라입니다. 많은 이를 걱정하게 한 쇠라는 고집스럽게 화폭에 점을 찍습니다. 이로부터 2년여 걸친 작업 끝에 필생의 역작을 그립니다. 결국 쇠라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이 점묘(點描)법창시자, 인상주의의 바통을 이어받은 신(新)인상주의 선구자임을 증명합니다.

그림이…묘하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6, 308 x 207 cm

정적이 감도는 이 그림에는 프랑스 파리 인근 그랑드자트 섬의 휴일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여름날의 매서운 햇볕이 섬 곳곳에 달굽니다. 모두가 각자 방식으로 휴식을 즐깁니다. 등장인물만 40명이 넘습니다.

그림은 크게 그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늘부터 보겠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부르주아 차림새남녀가 센강을 봅니다. 왼쪽에는 민소매 옷을 입은 근육질 남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뱃사공 같은 그는 여유롭게 담배를 태웁니다. 원숭이도 평온해 보입니다. 빛의 영역도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원피스를 입은 어린이가 뛰어다닙니다. 화사해 보이는 여성낚시를 즐깁니다. 누군가는 일광욕을 하고, 누군가는 양산을 펴고 산책을 합니다. 찬란한 빛을 받는 센강은 윤슬을 가득 품었습니다. 멀리선 길쭉한 배에 올라 강물을 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트도 두둥실 떠 있습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센강을 따라 파리로 들어오는 뱃길 초입에 떠 있는 그랑드자트 섬은 19세기 파리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쉼터 중 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의 한강공원과 비슷한 공간이었지요. '자트'는 프랑스어로 장식용 대접을 뜻합니다. 섬 모양이 대접 같아서 붙은 이름인 겁니다.

이는 쇠라가 고집스럽게 매달려 그린 작품,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입니다. 가로 3m, 세로 2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그림은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그림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무수한 점으로 그렸다는 겁니다.

한계 맞은 빛의 마술사들…新인상주의 등장

쇠라는 특유의 점묘법을 앞세워 신인상주의의 문을 연 화가입니다.

점묘법은 순색(純色)의 물감으로 무수한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기법입니다. 붓으로 '휙휙' 칠하는 게 아니라 '톡톡' 찍는 겁니다. 이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고민 끝에 등장한 방식입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순간의 인상을 잡으려고 했는데요. 그 빛, 그 시점, 그 장면을 탁 낚아채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가령 사과를 그릴 때 흔히 생각하는 빨간색으로 칠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과를 비추는 당시 빛의 밝기,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색으로 사과를 칠하려고 했습니다. 사과는 주황색도, 파란색도, 검은색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벽을 마주합니다. 빛은 섞일수록 더 밝아집니다. 화가들은 빛을 좇아 물감도 이것저것 섞어봅니다. 빛과 물감은 성질이 다르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빛과 달리 물감섞일수록 탁해졌습니다. 보기 싫을 만큼 칙칙해졌습니다. "물감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된 토론 주제였습니다.

조르주 쇠라, Le Chahut

고민에 빠진 화가 중 한 명이었던 쇠라는 과학의 영역에 손을 뻗어봅니다. 인상주의를 매너리즘의 늪에서 건진 위대한 한 걸음이었습니다.

신인상주의는 화가의 '필(Feel·느낌)'이 지배하던 인상주의에 설계와 분석, 즉 과학을 한 스푼 더했다고 보면 됩니다. 쇠라는 색을 다룬 여러 과학 논문을 섭렵했습니다. 때마침 그에게 답을 던져준 이가 있었습니다. 색채 이론가였던 미셸 외젠 슈브뢸입니다. 슈브뢸은 자신의 논문에서 다른 두 색을 병치(倂置)한 뒤 멀리서 보면 아예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해 "모든 색은 이웃하는 색에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가령 주황색을 표현하고 싶다면요. 빨간색과 노란색 점을 작고 촘촘히 찍은 후 약간 떨어져서 보면 된다는 겁니다. 굳이 이 두 색을 팔레트나 캔버스에 섞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쇠라는 직접 실험합니다. 서로 다른 원색을 화폭에 수백 개 찍고는 물러섭니다. "앗…!" 쇠라는 두 색이 망막(網膜) 위에서 뒤섞이는 착시 효과를 겪습니다. 실제로 이 색도, 저 색도 아닌 제3의 색이 나타납니다. 흥분한 쇠라는 다시 화폭에 다가갑니다. 다른 색으로 조합해봅니다. 점의 크기, 빽빽한 정도도 달리해봅니다. 쇠라는 앞뒤로 움직이기를 되풀이합니다. 미세한 조절에 따라 색과 분위기, 무게감까지 달라진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쇠라는 외칩니다. "…이거다!"

점의 세계, 풍요롭고 다채로운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다시 꺼내 봅니다.

산산이 흩어지는 한낮의 햇살, 풍성한 나무, 반짝이는 윤슬 모두 언뜻 보면 부드러운 중간색 톤의 조화 같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색색점들이 조밀히 찍혀 있습니다. 심지어 눈부시게 밝은 지점에선 검은색 점, 일부 옷과 그늘 등 새까만 지점에선 흰색 점을 상당수 볼 수 있습니다. 사각형의 원색 점(화소)을 모아 대상을 내보이는 디지털 이미지 표현법을 예견한 듯도 합니다.

쇠라는 순색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 대신 당시의 첨단 재료도 활용했습니다. 그 예가 아연에서 추출한 노란색으로 태양 빛을 묘사한 일입니다. 지금은 변색으로 갈색이 됐지만, 당시 이런 재료의 사용은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쇠라는 2년 내내 아침이면 그랑드자트 섬에 나가 풍경을 관찰하고 스케치했습니다. 저녁이면 작업실로 돌아와 인물과 사물 배치 변경, 점의 크기와 간격 조정 등을 반복했습니다. 쇠라는 이 그림에 앞서 연습작(드로잉과 색채 습작)도 60여 점이나 그렸습니다. 몇백 개도 아닌 수백만 개의 점을 찍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근력이 떨어지는 화가는 엄두도 못 낼 만큼 강도 높은 일이었습니다. 2년 내내 쇠라는 팔이 빠질 듯한 고통을 겪었을 겁니다.

신인상주의의 기수가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큰 이 그림에는 알레고리(allegory)를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푸생,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무엇보다 그림 속 사람들이 너무 고요하지요. 시간이 멈춘 느낌입니다. 옆을 보는 인물들은 고대 조각 같습니다. 물 위에 뜬 배도 모두 얼어붙은 듯하고요. 당시 쇠라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가였던 푸생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처럼 차분하되 웅장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인물의 움직임을 최소화한 겁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나무 그늘에 양산을 든 여성도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유행한 허리받이를 댄 치마 차림의 여성은 가죽끈을 쥐고 있습니다. 이는 원숭이로 이어지는 입니다. 당시 프랑스 속어로 암컷 원숭이는 매춘부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낚시를 하는 여성도 눈길을 끕니다. 프랑스어로 '낚시하다'와 '죄를 짓는다'의 발음이 비슷합니다.

다수의 미술 평론가가 "쇠라가 원숭이와 낚싯대를 통해 이 여성들의 정체를 암시했다. 휴일 쉬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사회의 위선을 그려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런 말장난과 풍자가 유행했거든요. 물론 "매춘부가 아니라 상류층의 정부(情婦)일 뿐이며, 원숭이는 이들의 사치스러움과 여유로움을 알려주는 장치일 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쇠라의 진짜 의도가 어떻든, 이 그림은 이러한 요소 덕분에 무성한 뒷말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한 가운데 있는 꼬마 숙녀도 보겠습니다. 은근한 존재감을 보입니다. 점투성이의 이 그림에서 소녀의 흰 원피스는 점묘법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쇠라가 색상환표 중 중간을 차지하는 흰색을 자신의 그림 중간에 '센스 있게' 배치해 안정감을 더하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옵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일부 확대), 1886, 308 x 207 cm

담배를 피우는 근육질의 남성, 책을 읽는 여인, 지팡이를 든 신사 등 여러 계층은 함께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 또한 착시입니다. 실제로는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묘사하는 듯합니다.

불굴의 실험정신, 고난 끝 ‘빛’ 보다

당시 쇠라는 프랑스에서 가장 앞서가는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말은 기성 화단의 견제 등 고난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쇠라의 눈에 점묘법은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조르주 쇠라, 아스니에르에서 멱 감는 사람들

실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볼 때 쇠라의 모든 새로운 시도는 장난질일 뿐이었습니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구상하던 1884년 그해에 쇠라는 살롱전에 '아스니에르에서 멱 감는 사람들'을 출품합니다. 점묘법을 완전히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풀을 그릴 때는 납작한 붓을 들고 비로 쓸듯 칠하는 발레예(Balayé) 기법을 활용했습니다. 사람들도 또 어색하리만큼 고요합니다. 쇠라의 이 작품도 딱히 그 시대 입맛에 맞춘 느낌은 아니지요. 기법과 표현 방식 모두 실험에 가까웠습니다. 결과는 폭풍 탈락이었지요. "그리다 만 인상주의 아니야?"라는 혹평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열 받은 쇠라는 직후 '상도 없고 심사위원도 없는' 단체인 독립미술가협회 창설위원으로 나섭니다. 쇠라는 그 후 인디 예술가의 길을 걷습니다.

폴 시냐크, Golfe Juan

쇠라는 신진 세력이던 인상주의 그룹의 견제 아닌 견제도 받습니다. 쇠라는 1886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합니다. 1874년에 첫 시작한 뒤 12년간 이어지던 이 전시회는 그 해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여기에는 쇠라, 당시 그와 함께 신인상주의자로 불린 시냐크가 한몫했습니다.

피사로, 모네, 드가 등 인상주의 스타들을 흠모했던 쇠라는 이들과 나란히 그림을 걸 생각에 설렜습니다. 인상주의 대부로 칭해지는 피사로가 "함께 합시다"라며 손을 내밀 때는 꿈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피사로를 뺀 인상주의 화가 대부분은 쇠라의 참여에 반대했습니다. "쟤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니잖아!"라는 이유였습니다.

함께 하던 '식구'가 아니고, 우리랑 회화 기법도 다르다는 겁니다. 쇠라는 피사로의 고집 덕에 겨우 전시 공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상당수는 결국 모임에서 탈퇴했습니다.

피사로, 빨래 너는 여인, 1887 (쇠라와 함께 지낼 때 그린 그림, 점묘법을 참고한 것으로 보임)

하지만 쇠라에게 낙선의 쓴 맛을 준 1884년과 달리 1886년은 그의 편이었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걸린 그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최고의 화제작이 됐습니다. 일단 크기부터 압도적이었습니다. 광활한 크기 대부분이 점으로 채워져 있다는 건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주목을 받은 만큼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불과 2년 전 낙제 성적표를 받은 쇠라 입장에선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사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권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늘 비슷한 그림을 내놓습니다. 가끔은 빛을 핑계 삼아 무엇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그림도 그려댑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니 "자꾸 좋다고 하니까 선 넘네?"라는 말이 돌았을 듯도 합니다. 쇠라의 작품에 감명받은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외쳤습니다. "새로운 인상주의의 가능성을 봤어. 이게 바로 신인상주의다!"

과묵한 아웃사이더, 아까운 요절
조르주 쇠라.

톡톡 튀는 그의 그림과 달리 쇠라는 부드러운 신사을 살았습니다. 쇠라는 1859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공무원이었습니다. 큰 규모의 부동산도 가졌습니다. 쇠라는 상식적 분위기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미술을 하겠다고 선언하니 부모님은 "응, 그래라~"라고 합니다. 용돈도 넉넉히 줍니다. 쇠라는 그 덕에 그 시대의 수많은 화가와 달리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파리 국립미술학교 출신의 쇠라는 1880년 초부터 그림 작업에 정진합니다. 쇠라는 과묵아웃사이더였습니다. 당시 주류 예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쇠라는 비슷한 처지의 젊은 화가들과 놉니다. 이후 점묘법을 개발하고, 그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린 후부터 삶이 달라졌지만요. 그쯤 쇠라는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질 만큼 점 찍기에 진심이었습니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사이드쇼

쇠라는 언제 어디서든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습니다. 쇠라를 보는 다른 화가들은 그에 대해 "수도사 납신다!"고 말할 정도였지요. 쇠라는 자신의 그림 모델인 마들렌과 동거합니다. 마들렌은 아들 피에르를 낳습니다. 쇠라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 마들렌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으로 쓰러져 사망합니다. 그때가 1891년, 만 31세였습니다.

창창한 나이, 탄탄대로가 된 앞길을 두고 비운의 화가로 요절(夭折)한 겁니다. 고작 몇 개의 작품으로 19세기 프랑스 화단에 자극을 준 화가로는 허무한 최후였습니다. 사망 원인은 수막염, 폐렴, 디프테리아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내 그림에서 시(詩)를 봤다고 하지만 나는 오직 과학만을 봤다." 쇠라가 남긴 이 말이 지금껏 그의 예술관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미국 보고 땅 치는 프랑스, 이미 늦었다

쇠라의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쇠라의 고향 프랑스에 없고 미국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쇠라가 죽은 뒤 그의 유족은 프랑스 당국과 미술관에 그림을 보관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쇠라는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에서 주목받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재미있는 신인', '잠재력을 가진 청년' 정도의 평이 많았습니다. 1874년,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로 눈 뜬 인상주의도 고작 10여 년 만에 "슬슬 식상하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역동적인 시대였으니까요. 요절한 쇠라가 조명받지 못한 채 잊히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도 그가 죽은 뒤 9년 만에야 겨우 800프랑(약 9만5000원)에 팔렸습니다. 그림은 돌고 돌아 수집가이자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의 보관인이었던 프레드릭 클레이 바틀렛의 손에 들어옵니다. 지불금은 2만프랑이었습니다. 안목 있던 바틀렛은 시카고 미술대학 미술관장에게 "운이 좋게도 프랑스 현대회화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림을 얻었어!"라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습작 가운데 하나.

뒤늦게 가치를 알아챈 프랑스는 다시 사들이기 위해 40만달러를 부릅니다. 당연히 시카고 미술관은 고개를 젓습니다. 프랑스는 땅을 쳤지만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후 쇠라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든 유화 습작은 1997년 소더비 경매에서 3520만달러(약 329억원)에 팔립니다. 또, 이 그림의 예술 포스터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마르크 샤갈의 '신부' 다음으로 많이 팔릴 만큼 사랑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가 놓친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현재 시카고의 대표 상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참고 문헌〉

서양 미술사, 에른스트 곰브리치, 예경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①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②‘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③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④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⑤“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⑥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⑦“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⑧‘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⑨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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