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에 주요 반도체 장비사 몰려 있어
한국 반도체 기업 투자가 이들 기업 실적 견인
세계 1위 AMAT 1분기 실적, 예상치 상회
TEL, 韓·美엔 첨단장비 팔고 中에 구형 ‘투트랙’
반도체 설비투자 확대로 반도체 장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일본 도쿄일렉트론(TEL) 사업장 모습. [유튜브 ‘TEL’] |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반도체 공장 유치 및 신규 고객사 확보를 위해 저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는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반도체 패권 전쟁으로 글로벌 시장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볼 기업들로 반도체 장비사들이 꼽히고 있다.
반도체 업황이 점차 살아나면서 설비투자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는 데다 반도체 공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는 만큼 반도체 장비 기업들의 존재감도 더욱 커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반도체 장비 시장을 사실상 독과점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 기업의 지배력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세계 반도체 장비 1위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는 15일(현지시간)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1분기(2023년 11월~2024년 1월) 실적을 발표해 주가가 시간외거래에서 10% 이상 급등했다.
AMAT의 1분기 매출은 67억1000만 달러로, 시장 예상치 64억70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이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임시 보고서를 보면 AMAT가 1분기 한국에서 거둔 매출은 약 12억 달러로 전체의 18%를 차지했다. 중국(45%)에 이어 두 번째로 매출 비중이 높았다. 일본(9%), 대만(8%)이 그 뒤를 이었다.
반도체 장비 세계 1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 [유튜브 'AMAT'] |
식각·증착 등 반도체 전공정 대부분에 필요한 장비를 생산하고 있는 AMAT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TSMC, 인텔 등 주요 제조사에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한국에서 거둔 연간 매출이 전년 대비 5% 증가한 46억 달러를 기록했다. AMAT는 이에 대해 “한국 고객사들이 반도체 장비와 서비스에 투자를 늘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AMAT는 올 2분기에도 AI 열풍에 힘입어 시장 예상치인 59억2000만 달러보다 높은 65억 달러를 거둘 것으로 전망해 확실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세계 3위 반도체 장비 기업이자 일본 내 1위 사업자인 도쿄일렉트론(TEL)도 최근 반도체 업황의 반등 흐름에 올라탄 수혜 기업으로 꼽힌다. 역시 삼성전자, 인텔, TSMC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으며 장비 사업 매출은 주로 중국(47%), 한국(13%), 대만(10%), 북미(9%)에서 발생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은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기 위해 감광액(포토레지스트)을 바를 때 쓰는 코터(Coater)라는 장비와 현상할 때 필요한 디벨로퍼(Developer) 장비 시장에서 글로벌 톱을 자랑한다.
최근 일본 장비사들의 주요 고객은 중국이다. 중국이 범용 반도체 장비 구매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의 규제가 집중된 10나노 이하 첨단 공정보다 20나노 이상 구형(레거시) 공정에 힘을 싣기로 노선을 바꿨다. 이에 따라 일본 장비 기업이 특수를 누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선영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일본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미국, 대만, 한국 등 기존 고객사에 첨단 장비를 팔고, 구형 장비는 중국에 판매하는 투트랙 전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며 “도쿄일렉트론은 첨단부터 구형 공정 장비까지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상황에 가장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업체”라고 설명했다.
일본 반도체 장비 1위 기업 도쿄일렉트론(TEL). [유튜브 ‘TEL’] |
이처럼 반도체 장비 시장의 성장세가 뚜렷해지자 이에 가세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카메라로 유명한 일본 캐논과 니콘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까지 반도체 노광장비 시장을 주름잡았던 이들 기업은 네덜란드 ASML에 자리를 내줬지만 최근 도전장을 내밀었다.
세계 2위 장비 기업인 ASML은 반도체 크기를 줄이는 초미세 공정의 필수 장비로 꼽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 중이다. 반도체 회로를 더 얇게 그리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든 제조사들이 ASML을 바라보고 있다. 반도체 회로를 정밀하게 새길수록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장착해 처리 속도와 메모리 용량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16일 대전에서 열린 ‘미래 과학자와의 대화’ 행사에서 “ASML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EUV 노광장비가 없으면 첨단 나노 반도체를 도저히 만들 수 없다”며 “그러다 보니 장비 한 대 가격이 7000억원인데도 한국, 미국, 중국 등 반도체 강국들이 줄을 서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논은 ASML과 달리 반도체 설계 디자인을 웨이퍼에 찍어내듯 각인하는 ‘나노 임프린트 리소그래피’ 장비로 ASML이 독점한 노광장비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는 계획이다. 캐논은 아직 출시 전인 자사 반도체 장비에 대해 “빛을 기반으로 하는 ASML 공정보다 최대 90% 전력을 덜 소모하고 가격도 ASML보다 한 자릿수 저렴하다”고 밝혀 실제 성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ASML 역시 일본에 기반을 둔 캐논, 니콘 등을 주요 경쟁사로 보고 있다. 최근 발간한 2023년 연례 보고서에서 “상당한 재정 자원을 보유한 새로운 경쟁자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맥락에서 자급자족을 달성하려는 이들과의 경쟁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ASML의 언급대로 최근 일본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워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구축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만큼 일본 반도체 장비 산업도 앞으로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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