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현대서울 ‘서양미술 800년전(展)’
런던, 파리 등 4개 도시서 온 70여 점
템페라 그림부터 ‘엘튼 존’ 소장作까지
4일 송한나 현대백화점 책임 큐레이터가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의 작품 ‘테레주 프라이프라우 폰 베트만의 초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희량 기자 |
[헤럴드경제=김희량 기자] “백화점에서도 ‘예술의 정수(精髓)’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양미술의 800년 역사를 한 공간에 담았죠.”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미술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부터 남달랐다. 9호선 여의도역에서 걷다 보면 LP음악이 흐르는 더현대 서울 지하 2층 서점인 스틸북스에 자연스럽게 발이 멈춘다. 각 층에 흩어진 맛집과 매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6층에 오른다. 푸른 식물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면 비로소 1300억원 상당의 그림 7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미술관도 박물관도 아닌 백화점이다.
더현대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알트원(ALT.1)이 5일부터 오는 9월 18일까지 ‘서양미술 800년전(展)’의 화려한 페이지를 연다. 헤럴드경제는 알트원에서 전시 기획자인 송한나 현대백화점 책임큐레이터를 만나, 4개국에서 출발해 더현대 서울에 도착한 작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송 큐레이터는 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기획과 국내 대기업의 해외 상품전시를 담당했던 이력이 있다.
송 큐레이터는 백화점 전시관이 가진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전시로, 이번 주제를 꼽았다. 그는 “박물관 관람객은 일반적으로 ‘어디를 가서 뭘 보겠다’는 뚜렷한 목적성을 갖고 움직인다”면서 “알트원은 쇼핑과 식사 같은 일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예술을 만나는 백화점 내 공간이라는 게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백화점은 이제 ‘100가지 물건(貨)을 파는 곳’을 넘어 100가지 이야기(話)와 그림(畫)이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파밀리아레 델 보카티의 ‘천사들과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계란 노른자를 이용한 템페라를 활용해 목판에 그린 작품이다. 김희량 기자 |
엘튼 존이 소장했던 장 바티스트 우드리 ‘라퐁텐 우화 속 어부와 작은 물고기(1739)’. 김희량 기자 |
전시는 1300년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 상징성을 갖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유럽 르네상스의 서막을 연 미술 재료인 템페라(계란 노른자를 안료와 섞어 만든 물감)를 사용한 파밀리아레 델 보카티의 ‘천사들과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대표적이다. 템페라를 쓴 작품은 유럽의 대형 교회 등 한정된 곳에서만 볼 수 있어 희소성이 크다. 세계적인 가수 엘튼 존이 소장했던 장 바티스트 우드리 ‘라퐁텐 우화 속 어부와 작은 물고기(1739)’, 제작된 해 이후 대중에게 최초로 전시되는 빈첸초 카비안카의 ‘비아레조 해수 온천에서(1866)’ 역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작품당 가격은 수십억원에서 100억원이 넘는다.
고가의 희귀 작품들을 섭외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일까. 송 큐레이터는 옛 거장의 그림들을 일컫는 올드마스터(Old Master)의 소장 이력을 확인하는 과정을 꼽았다. 고미술 작품은 유물에 준하는 가치를 지니는데 세계대전 등 특정 시점에 약탈당한 기록이 있으면 상업 전시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송 큐레이터는 “큐레이터들이 프랑스 루브르나 미국 게티센터 같은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까닭은 자랑이 아니라 소장 이력을 알려주기 위해서다”라며 “이번 전시에도 2~3년간 행방이 묘연해 가지고 오지 못한 작품들이 있다”고 말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 서 있는 송한나 큐레이터. 김희량 기자 |
송 큐레이터가 특별히 추천하는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다. 17세기 가장 유명 여성화가로 손꼽히는 젠틸레스키가 죄 많은 과거를 묵상하는 마리아를 절제된 방식으로 그렸다. 1620년대 로마의 활기찼던 미술계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70여 점 중 가장 희소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현대백화점을 통해 소장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와의 협업으로 1년의 준비 기간이 걸렸다.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는 런던내셔널갤러리, 루브르 아부다비 등 세계적인 박물관과 작품을 거래하는 세계적인 갤러리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Frieze)에서 본 갤러리의 작품을 더현대 대구에 전시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런던, 파리, 밀라노, 뉴욕 4개 도시에서 운송된 작품은 한국에 도착한 이후 감정사에 의해 액자 하나하나와 뒷면까지 살펴보는 검증 작업을 거쳤다. 알트원은 전시를 앞두고 열흘에 걸친 시설 점검과 작품 보존 능력을 개선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고가의 작품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더현대 서울 6층 알트원으로 가는 길. 김희량 기자 |
빈첸초 카비안카의 ‘비아레조 해수 온천에서(1866). 제작된 해 이후 처음으로 대중에게 전시되는 그림이다. 김희량 기자 |
250평 규모의 알트원은 3년 전 개관 이후 유료 관람객이 100만명 넘게 찾았다. 연평균 30만명이 방문한 기록으로, 이는 서울 소재 미술관 연평균 관람객 수 약 5만5000명의 5배가 넘는다. 앞서 앤디 워홀, 라울 뒤피 등 유명 작가의 전시부터 폼페이 유물전 등을 펼쳤다.
현대백화점도 ‘더 아트풀 현대(The Artful HYUNDAI)’를 내세워 전국 백화점 및 아울렛 점포에 예술 감성으로 채운 공간을 만들고 있다. 예술을 통해 차별된 경험을 선사하는 아트 마케팅 차원에서다.
이번 전시의 예고편은 더현대 서울 1층 루이뷔통 매장 인근에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설치형 작품인 ‘생명의 나무(2007)’다. 3m가 넘는 이 작품을 현대백화점은 대중 관람을 위해 특별히 외부에 전시했다. 송 큐레이터는 “내년 말까지 알트원의 전시 일정이 잡힌 상태”라며 “‘서양미술 800년전(展)’ 다음으로는 분위기를 전환할 일본 유명 일러스트 작가의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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